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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수 목사와 함께한 몽골 전도여행기
2006-03-22
박옥수 목사와 함께한 몽골 전도여행기

[전도여행 앨범보기]
기간 : 2006년 3월 16일(목) - 19일(일)새벽

몽골 대학생들의 밝고 순수한 눈 속에서 몽골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지하자원이 무궁무진한 나라지만 개발할 경제적 여력이나 기술이 없어 방치되어 있다.
외국의 투자자들은 몽골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속속들이 진출하고 있다.
우리는 늦게 몽골에 왔지만 하나님이 그동안 일해 오신 것을 전도여행을 통해 우리 앞에 보여주셨다.

1. 징기스칸 공항 VIP실

징기스칸 몽골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한인회에서 마음써주어 공항 VIP실을 이용해 공항에서 빠져 나와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했다. 공항 VIP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박옥수 목사 몽골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IYF활동 사진들이 보여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공항 전체 안내 모니터에 나왔다고 한다. 공항VIP실, 방문환영 안내 영상 , 영빈관... 예상하지 못했던 환대를 받으며 몽골에서의 첫날밤을 맞았다. 몽골에 첫 발을 내 딛는 발걸음을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기다리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2. 숙소 영빈관

시내를 통과할 때 보이던 송유관 같은 배관은 온수배관이라고 한다. 이것을 통해 곳곳으로 더운물을 공급하여 집의 난방을 해결 한다고 한다. 화력발전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울란바타르시의 밤하늘은 뿌옇게 보였다. 하지만 대통령 궁 내에 있는 영빈관은 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어 공기가 참 맑고 좋았다.

건물을 오래되 보였지만 내부 시설들은 깔끔하고 고풍스러웠다. 건조한 날씨이고 카펫이 깔려있어 수만 볼트의 정전기가 자주 발생했다.
다음날 새벽 모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께서 창세기 8장 말씀을 통해 저주와 심판을 부르는 하나님과 다른 마음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제거하시고 삶을 복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몽골에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몽골을 바꿀 것이 기대가 되고 소망이 되었다.

3. 간디 국회 교육분과 상임위원장과의 만남

울란바타르시의 아침 바람은 몹시 메서웠다. 옷을 뚫고 들어오는 찬공기는 몸 전체가 동시에 싸늘해지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반면 상임위원장님을 만나기 위해 들린 국회 공관 건물은 정말 단열이 잘 된 건물 이었다. 외부에서 볼때는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참 잘 꾸며져 있었다.
상임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미로같은 복도를 지나 집무실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한 잠시 뒤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와 당차보이는 인상을 한 간디 상임위원장께서 들어오셨다. 여성으로서 4선의원이고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시다. 들어오시면서 비서들에게 몇몇가지를 지시하고 신문을 집어 들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동안 자신이 몽골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소개를 했다. 목사님께서는 IYF 설립의 동기와 앞으로의 미래 주역들인 각 나라의 대학생들이나 젊은 청소년들을이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밝게 자라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몽골의 젊은 청소년들을 위해 IYF 몽골지부를 설립하려고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IYF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꼭 지원하겠다고 하셨다. IYF에서 활동 중인 세계 젊은 청소년들을 위해 서면 인터뷰를 통해서라도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드리면서 우리는 학위 수여식이 있는 몽골 국립대학교로 출발했다.

4. 학위 수여식
몽골 국립대학교는 1942년에 개교하여 현재 15개 대학을 가지고 있는 몽골 최고의 대학교로서 현 러시아, 유럽, 미국 등에서  수학한교수진들이 몽골의 미래를책임질 젊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는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학교이다. 대학교 본관은 바로 도로변에 붙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또 문이 있었다. 아마도 추운 겨울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서 이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현관로비는 생각보다 작았다. 그런데 한쪽편에 꾀 넓은 곳에 옷이 걸려져 있었다. 겉옷을 벗어 보관해 놓는 곳이었다. 잠시뒤 학장님께서 내려오셨고 우리를 총장실로 안내했다. 총장실은 비서실을 지나 햇볕이 꾀 많이 들어오는 방이었다. 총장님은 꾀 젊어 보였다. 9년동안 국립대학교 총장을 하고 계신 분이셨다. 총장님은 간략하게 몽골 대학교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몽골 국립대학교는 변화하고 있었다. 몽골 정부도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국제화에 초점을 맞추어 변화된 정책을 마련하고 각국과 교류 증진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또한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된 나라이기에 선진국의 외국 투자 자본들이 많이 밀려오고 있었다. 변화의 중심부에는 뜨거운 교육열 속에 자라나는 몽골 청소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의 혼돈과 정신적 빈곤을 느끼며 살고 있다. 몽골 청소년들은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아 가기 보다는 인도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몽골 국립대학에서 국제청소년연합(IYF)의 활동 상황을 알게되어 IYF고문으로 계시는 박옥수 목사님을 몽골 국립대학교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써 양국간의 민간교류를 꾀하며 특히 IYF와 인연을 맺음으로서 학생들에게 보다 폭넓은 국제활동의 기회를 부여하고자 했다.
박 목사님은 올 여름에 있을 IYF세계대회에 국립대학교 교수진과 학생들 20여명을 초대한다고 하셨다. 비행기 요금과 한국에서의 체류비용 일체를 다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셨고 총장님은 감사하다고 하셨다.
자리를 옮겨 학위 수여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는 이미 철학과 학생들과 한국어학과 학생들 및 박사 교수진들 등 200여명이 참석해 있었다. 또한 MNTV(몽골 국영방송)에서 취재를 나와 있었다. 사회과학대학장님의 학위수여의 의미와 학위증 낭독을 시작으로 학위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학위 수여식이 진행되는 동안 몽골 전통음악과 학생들의 연주가 간간히 들였다. 한국의 아쟁이나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들이었는데 소리가 참 곱고 아름다웠다.  
학위 수여식은 학위증 낭독, 학위복 착복, 목사님의 학위수여 소감, 기념품 전달, 꽃다발증정, 개교이래 지금까지 학위를 받아온 분들이 글을 남긴 방명록에 서명 순으로 진행되었다. 사회과학 학장님은 국제청소년연합의 활동은 몽골이 지금 당면해 있는 몽골의 국제화 문제에 대해서 청소년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좋은 모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학위 수여식이 끝나고 참석한 학생들에게 IYF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IYF 홍보 영상물을 시청하고 나서 리오 몬따냐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 특히 한국 노래를 부를 때는 몇 소절씩 학생들이 따라 부르며 같이 박수치며 기뻐했다. 학생들이 박수 치는 것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시작하면 제각각 박수 치는 것이 아니라 박자를 맞춰서 박수를 친다.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역역히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의 표정이나 눈빛은 참으로 순수하고 깨끗했다.
IYF 소개가 끝나고 박 목사님께서 30여분 정도 강연을 했다. 목사님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또 내 주위 사람들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막을 횡단하다 길을 잃어 절망하고 있는 아들의 마음에 아버지의 소망이 전달되고 받아들여졌을 때 아들이 절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목사님께서 만난 하나님을 소개했다. 목사님 자신도 어둡고 소망없이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롭게 되었고 IYF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수많은 세계 청소년들이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강의 시간 동안 학생들은 진지하게 목사님 말씀을 경청했고 강의가 끝난 후 목사님과 사진 촬영도 하고 130여명의 학생들이 IYF 회원으로 가입했다.


5. 코리아 하우스

모든 학위 수여식을 마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갔다.
차 창 밖으로 보이는 울람바트라 시내 풍경은 인상적인 것이 많았다. 무선 전화기(일반 전화기처럼 생겼음)를 들고 길거리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돈을 내고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마치 공중전화와 같은 것이었다.) 양지바른 건물 벽에 책들을 펼쳐놓고 책 판매를 하는 모습, 광고 간판들, 거리를 오가는 차들 중에 한국 차들이 꾀 많았다. . 식당에 도착하자 주차장에 몇몇 아이들이 찬바람이 부는대도 얇은 옷을 입고 세차를 하고 있었다. 몽골 사람들이 한국 식당에서 밥 한 끼 사먹는 것은 굉장한 자랑거리가 된다고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월 소득이 보통 6만원에서 10만원쯤 되는데 한 끼에 5000원하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사는 잘 된다고 한다한국 음식을 맛있어하고 한류열풍의 영향도 있다고 한다. 또 먹다가 남긴 음식들은 모두 싸서 가져갈 수 있기에 더 좋아 한다고 한다.
한국을 좋아하는것은 비단 지금 동남아권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한류 열풍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유목 생활을하던 몽골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농사도 가르쳐주고 여러 가지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어서 오래전부터 한국인들에 대해서 친숙하게 지내왔고 현재에도 장학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몽골 학생들을 돕고 불우한 아이들을 양자 삼아 키우는 한국 사람들도 여럿 있다고 한다. 이 식당 주인도 십여명의 불우한 몽골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으로 몽골에서 한인회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한인회장님과 남양주시장학회 회장님과 같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는데 식당 주인께서 특별히 양고기 찜 요리를 해오셨다. 맛있기는 했지만 이미 배가 불러 있어서 많이 먹진 못했다.


6. 역사 박물관 견학

몽골 국립 역사 박물관 견학을 하면서 몽골이 우리와 아주 흡사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몽골 초기의 문화는 고조선과 흡사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고조선에서 사용하던 이두문자를 연구하게해 만들게 했기에 몽골어에는 우리 한글과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고 한다. 몽골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의 생김새는 아주 흡사하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구분 못할 만큼. 전시되어 있는 농기구나 악기, 말 잘 타는 것 등. 몽골 최대의 전성기였던 징기스칸 시절의 문화는 정말 눈부셨다. 하지만 지금의 몽골과 왠지 단절되 있는 듯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찬란했던 문화는 청나라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짓밟혀 버렸고 몽골 말살 정책은 1991년 소련이 붕괴 되면서 몽골이 독립하게 될 때까지 이어졌다. 몽골에 있는 학교에는 운동장이 없다. 체격도 좋고 체력도 좋은 몽골을 다스리려고 운동이나 체력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었다고 한다. 아직도 내몽고 자치구(중국 영토에 편입됨)는 중국관할이다. 몽골도 우리가 가진 식민역사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몽골의 문화가 단절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면 얼마나 발전했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어트공텡겔 대학으로 향했다.


7. 어트공텡겔 대학 초청 강연

몽골의 사립대들은 15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몽골의 교육열은 우리나라 못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등학교과정에 해당하는 교육과정까지 정부에서는 의무교육으로 해 놓았다. 역시나 이 대학에도 운동장은 없었다.

새롭게 지은 건물은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역시나 인상적인 것은 외투를 보관해 놓는 방이었다. 세미나실에서 강연 준비를 하는 동안 접견실에서 나란치믹 총장님과 면담을 가졌다. 목사님은 대학의 교수진과 학생들을 올 여름에 있을 IYF세계대회에 초대했고 앞으로 IYF와 지속적인 교류를 갖게 되길 바란다고 하자 총장님은 지금 몽골 대학생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국제교류라고 하시면서 흔쾌히 승락했다.
강연은 IYF 홍보영상물 상영으로 시작했고 리오 몬따냐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리오 몬따냐가 한국어로 노래를 부를 때 학생들은 따라부르며 환호했다. 역시 박수는 박자에 맞춰서 쳤다.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대부분 한국어학과 학생들이었다.
목사님은 강연을 통해 서로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 더 넓고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전쟁에서 지뤼를 밟아 불구가 된 미국군 존이 어머니는 이런 내모습을 싫어 할거야 귀찮아 할거야 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몰라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와 마약과 술에 찌들려 마약중독자로 죄악된 삶을 고통스럽게 살던 러시아의 알란이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는 두가지 이야기를 하셨다.
자기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 새로워진 알란처럼 몽골의 젊은 청소년들이 변화되어 전세계를 누비며 몽골을 알리게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학생들이 IYF 회원으로 가입신청을(70여명)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몇 일행들은 몽골 국영방송인 MNTV 방송국으로 향했다.



8. MNTV(몽골국영방송) ‘밝은 창’ 대담 프로 녹화

라디오방송과 TV 방송을 같이하고 있었다. 꾀 규모를 갖추고 있는 방송국이었다.
공산주의 시절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통치 수단이었기에 시설 면에서도 잘되 있었다.
잠시 PD와 이야기를 나눈 후 스튜디오로 갔다. 조금은 비좁은 스튜디오였지만 프로그램 녹화하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일행 모두가 스튜디오에 들어가 프로그램 녹화를 지켜보았는데 누가 진행자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목사님은 IYF에 대해서 설명을 잘 하셨다. IYF 설립배경과 IYF의 활동 상황을 자세히 소개했다. 끝으로 진행자가 방송 출연자 예우 차원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하라고 했다. 목사님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1962년도 한 청년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구원 간증을 하시면서 몽골의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어 세계곳곳으로 가서 활동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국영방송에서 마음껏 예수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IYF를 정확하게 홍보할 수 있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녹화는 밤 12시에 방영이 된다고 했다.(참고로 몽골의 TV 시청률이 가장 높을 때가 11시부터 12시까지이다.) 방송국을 나서 늦었지만 저녁식사를 하러 북한에서 운영하는 ‘평양 목란관’ 식당으로 갔다.
목사님 장로님들 모두 우리가 너무 늦게 몽골에 왔다고 아쉬워 하셨다. 우리 눈에 보여진 몽골은 생김새도 비슷하고 정서도 비슷하고 한류열풍과 오래전부터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나라임이 확인되면서 하나님이 몽골에 복음 전하시길 오래전부터 기뻐하셨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늦게 왔기에 하나님께서 몽골의 정치 교육 언론매체들 속에 확실하게 IYF와 우리 선교회를 각인시키시는 것을 느꼈다.


9. 평양 목란관

북한는 외화벌이를 위해서 중국과 몽골에 식당을 직영한다고 한다.우리가 저녁 먹으러 간 평양 목란관 이라는 식당도 북한에서 직영하는 식당이었다. 거기에서 한인회 직원들과 함께 우리 일행은 저녁을 같이 하게 되었다. 육개장과 당고기를 시켰는데 한국에서 먹던 것 보다 얼큰한 맛은 없었지만 북한 음식을 먹는 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먹었다. 음식을 먹는 중간에 국영 방송 9시 뉴스 시간에 목사님의 학위 수여 소식이 나왔다. 오늘은 몽골 국군의 날이어서 국군의 날 행사 소식이 참 많았다. 아침에 만났던 간디 국회 교육분과 상임위원님도 뉴스 시간에 몇 분간 나왔다. 꾀 유명한 분이셨다. 박사학위 수여식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 되었다.  올해 몽골 국립대에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명예박사 학위는 한국인 박옥수 목사 IYF고문에게 돌아갔다는 맨트를 시작으로 5분여 동안 박사학위 수여 소식이 방송 되었다. 우리는 그냥 아나운서가 몇마디하고 1분정도 소개가 되겠지 했는데 무려 5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소개되었다. 정말 감사했다. 하나님께서 몽골에서 복음 전하시길 너무나 기뻐하시며 이번 몽골 방문을 정말 기뻐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축하 순서에 음악이 빠질 순 없었다.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먼저 남쪽의 리오 몬따냐가 새타령과 복음 성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등등을 불렀다. 이어서 북한에서 온 아가씨들(서빙도하고 공연도하는)도 반갑습니다. 휫파람, 안해(아내)는 세상의 꽃이라네, 아침이슬 등을 메들리로 불렀다. 북한 식당에서 리오 몬따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음 성가를 들으며 머잖아 북한 땅에서도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겠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리오 몬따냐 노래를 여러번 들어 봤지만 정말 감격스러웠다.
숙소로 돌아오니 11시. 일행보다 좀 늦게 숙소에 도착했는데 장로님들이(도기권장로님, 이형모장로님,황효정장로님, 이종소 집사님) 목사님 숙소에 모여 계셨다. 오늘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12시가 가까울때 리오 몬따냐와 우리 스탭들은 한 방에 모여 목사님께서 저녁때 녹화한 대담프로를 지켜 보았다. 정말 감사했다.

10. 기도회
다음날 아침 새벽에 몽골로 파송오실 김상수 목사님의 간증겸 말씀을 들었다.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게 된 간증을 하셨다. 김상수 목사님의 마음을 세밀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다.
새벽 모임이 끝나고 박목사님께서 장로님들과 앞으로 몽골에서의 활동 방향을 의논하셨다. 몽골에서는 IYF 지부를 설립하여 IYF활동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집도 대학 근처에 얻고 대학 내에 강의실을 빌려서 한국어도 가르치고 또 몽골말도 배우며 학생들에게 유익한 IYF 활동을 대학내에서 하기로 했다. 한국어 교실이나 영어캠프 등을 계획할 수 있었고 Goodnews Corps 학생 두명 정도 파견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몽골에 많은 비젼을 가지고 계신것에 감사했다.
새벽 모임 후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박목사님은 압곡동 시절을 떠올리면 기도를 시작하셨다.
“초라하게 시작했던 압곡동 시절 그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곳 몽골까지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안에는 이미 있었습니다.‘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줄 믿노라‘는 말씀처럼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습니다. 초라한 우리들이었지만 당신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몽골이 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몽골말로 찬양하는 날이 멀잖았습니다.

저는 구원 받기전 잘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하나님이 풍성하게 하셨고 저를 사람들 앞에 세우셨습니다. 머잖아 하나님께서 몽골을 그렇게 세우실줄 믿습니다. 몽골을 복주십시오. 국립대를 복주시고 총장님이나 교수님들 학생들을 복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손길을 그냥 지나치지 말게 하시고  몽골을 복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김상수 목사님과 교제했던 박 목사님 통역을 전담했던 바이샤가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통역하는 것이나 심부름 하는 것이나 정말 온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했던 청년이었는데 정말 감사했다.


11. 서울레스토랑

기도회를 마치고 짐을 챙기고 나서 국립대 총장님과 교수님들 그리고 한인회 임원들과의 오찬이 약속된 서울레스토랑으로 갔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리오 몬따냐 공연을 했다. 공연을 하고 나서 IYF 홍보 영상을 보기로 했는데 우리가 가져간 DVD에 문제가 있어서 플레이가 제대로 되질 안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해결이 안되었었다. 그래서 일단 식사를 더 하고 나중에 상영하기로 했는데 마침 MNTV 방송국 PD가 어제 방송된 박 목사님 관련 자료를 가지고 왔다. 우리 모두는 그 영상물을 보았다
참 감격스러웠다. 그 식당에 식사하러 온 일반 사람들도 모두 그 영상물을 시청했다. 정말 감사했다. 어딜 가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내셨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셨다. 정말 감사했다. 국립대 총장님과 교수님들도 너무 기뻐하고 좋아했다. 황장로님은 그 자리에서도 통역을 통해서 IYF를 소개하는데 마음을 쏟고 계셨다. 참 아름다워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한인회관에 잠깐 들렸다. 남양주시와 올람바트라시가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남양주시에서 지은 건물에 한인회관이 있었다. 그곳에는 세미나실도 있고 한국어교실 태권도 교실등이 있었다. 지금 현재 울람바트라 시에 살고 있는 한국인 자녀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한인회관 건립기금을 마련하고 있었다. 우리도 각자가 얼마씩 모아서 그 기금으로 써달라고 한인 회장님께 전달했다. 참 감사해 했다.


12. 테렐지 국립공원

한인회관을 나와 테렐지 국립공원에 가기로 했다.
한인회장은 자기가 타던 튼튼한 차를 내 주며 차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몽골의 풍경은 정말 이색적이었다. 산에는 나무가 한그루도 없었다. 빼족하거나 모나지 않은 산 그렇기에 유목생활하기 정말 좋은 곳이었다. 시냇물이 흐르고 그 곁에는 양이나 소나 말들이 자유롭게 꼴을 뜯고 있었다. 문득 저기에 공만 하나 있으면...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축구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좋아하기에 초원을 보는 순간 공이 떠올랐다. 간간히 유목민들의 집인 쉘이 차창밖으로 보였다. 차를 타고 40여분을 지나자 낯설지 않은 산들이 보였다. 쭉쭉 뻗은 침엽수 나무들 사이로 능선이 있었고 말들이 뛰놀고 있었다. 휴게소 같은 곳에 이르렀을 때 저쪽 끝에서 말을 탄 아이들이 나타났다. 몽골의 이이들은 3세부터 말타기를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 5세가 되면 말을 타고 100Km를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잘 타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젖을 먹으며 한참 제롱을 부릴 나이의 아이가 말을 타고 100km를 달린다니...
몽골 사람들은 참 기골이 장대하고 호전적이라 하더니만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도 말을 타보기로 했다. 말 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말고삐를 잡고 끌어주었다. 말들이 어색한 주인을 만나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말과 하나가 될 때 말도 힘들지 않고 사람도 힘들지 않다고 한다. 난 참 뻣뻣한 사람이었다. 말과 하나가 되려하기 보다는 위에서 불안 해 하기만 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그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내가 비록 그럴지라도 이 말처럼 날 떨어뜨려 버리지 않고 묵묵히 태우고 가는 말이 마치 종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동안 몽골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13. 영빈관에서의 만찬

국립공원에서 영빈관으로 돌아오자 마자 한인회에서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다.
한인회장의 환영사와 목사님의 답례인사가 있고 나서 서로 담소하며 식사를 했다. 영빈관 음식은 나라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라 그런지 몽골 음식을 양식 스타일로 만들어 맛깔스럽게 내 놓았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났을 때 쯤 갑자기 목사님께서 성경책을 찾으셨다. 목사님께서는 식사를 하시면서 한인회에서 오신 분들에게 계속 말씀을 전하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들 앞에 가서 성경책을 펴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 목사님의 표정은 정말 진지했고 목사님의 말씀은 간단 명료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동안 이분들을 끌고 다니던 사단의 생각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마음을 심기에 충분했다. 한인회장님은 수첩에 메모를 해 가며 말씀을 들었다. 지금도 그 영빈관 식당에서 성령에 이끌려 복음을 전하시던 목사님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생각되었지만 목사님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분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 모습 속에서 목사님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영상교제 때문에 목사님은 전화통화 하러 숙소로 올라간 사이 김상수 목사님께서 바톤을 이어받아 말씀을 전하셨다. 순간 이분들에게 전도지를 하나 드리고 싶었다. 배낭 속에 담겨져 있는... 근데 한권 밖에 없었다. 그 때 황장로님께서 주간신문 두 부를 꺼내셨다. 말씀을 잘 듣던 세분에게 전도지를 나눠드렸다. 참 감사했다. 건축 설계 일을 하신다는 분은 끝까지 말씀을 진지하게 들으셨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영빈관을 나와 징기스칸 공항으로 일행 모두가 출발했다. 공항 VIP실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고 있는데 갑자기 김상수 목사님은 여기 남아서 집 구해 놓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이 되어 남게 되었다. 참 우리의 삶은 모를 일이었다. 성령께서 그렇게 일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전도여행은 이제까지 우리가 해본 전도여행과는 사뭇 다른 전도여행이었다.
복음 전하는데 박사학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지만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기에 목사님은 교회의 뜻을 받아 들이셨다.
짧은 전도여행이었지만 하나님은 몽골 곳곳에 복음의 흔적들을 남기셨다.

새롭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몽골.
몽골은 지금 새로운 봄을 준비하고 있다.
다가오는 봄은 몽골 역사 이래 처음 맞는 새 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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