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A. 이사야 29장에는 성경을 ‘봉한 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영(靈)으로는 단지 성경의 내용은 이해할 수 있어도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그 영이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단이 인간을 지배하여 인간에게 혼미한 마음을 넣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선악의 판단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이 ‘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우리의 마음이 죄와 사단에게서 벗어남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죄인의 삶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성경 속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가르쳐 줍니다.
얼핏 보면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이해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아 성령을 우리 마음에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비밀스럽게 감춰진 성경 전체가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Q 실제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A.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귀 등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만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지극히 제한적인 육신의 눈과 귀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천국을 보고 듣고 느끼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실제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너무 작은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귀로는 가청범위 안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듣지 못하고,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 역시 너무 작아서 들을 수가 없죠.
천국은 다만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자체가 거짓되고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으로 신령한 세계를 감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신령한 세계를 감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통해 신령한 하늘의 세계를 보고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성령이 아니고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Q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건가요?
A. "단순히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선을 행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먼저, 내가 아담의 후손, 즉 죄의 씨로부터 출생해서 나의 어떤 노력과 선한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인간은 이미 선하게 사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도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선하게 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모를 때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려고만 하는 행위에 매인 신앙인이 되기 때문에, 얼마 못 가 지치고 피곤해져서 형식적인 신앙인의 겉모습만 갖게 되는 위선적인 삶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나의 어떤 선한 행위도 나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에게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가 되면 그때 비로소 예수님의 보혈이 내 죄를 씻고 의롭게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믿어져서 죄에 대한 해방이 오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마음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의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시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도 육에 속해 있기에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을 미련하게 봅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 아래 머물러 가책과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주간 기쁜소식 독자 모두 분명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교회와 연결되어 구원받고 거듭나 마음에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Q 기독교에서 말하는 ‘휴거’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A. "한자어인 휴거의 ‘휴(携)’는 끌다, 이끌다, 가지다 등의 뜻이고, ‘거(擧)’는 들다, 일으키다, 빼어 올리다라는 뜻으로, 두 글자를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영어에선 휴거를 ‘Rapture’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Rapture란 보통 큰 기쁨, 황홀경이란 뜻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의미로는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그리스도와 공중에서 만나는 체험(신학)’이라고 영어사전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휴거는 실제로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용어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 구절의 ‘일어나고’, ‘끌어 올려’라는 어구에서 끌다(携)와 들다, 일으키다, 빼어 올리다(擧)라는 의미를 한자로 만든 합성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 있고, 초대교회 때부터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무척 사모하고 기다려 왔습니다.
이것은 성경 히브리서 9장 2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우리의 죄 값으로 당신 자신을 드리셨는데, 그 사실을 믿고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신다고 약속하신 사실로 더욱 분명해 집니다.
2천 년 전에 주님은 죄인을 의롭게 하기 위해 오셨지만, 머지않아 다시 오실 주님은 죄인의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Q 기독교의 교파는 어떻게 분류되고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요.
A. 기독교에서 교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기독교의 여러 교단을 가리킵니다. 지금의 기독교 교파는 크게 3개의 교파로 구분하는데, 정교회·천주교·개신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침례교·감리교·장로교 등 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교파가 분열하게 된 원인은 ▲성경을 보는 견해 차이 ▲보수와 진보의 차이 ▲신사참배한 사람들에 대한 처리문제 ▲지방색의 반영 등이 있습니다. 그 외 나머지 소분열 등은 아무 원인 없이 인간의 탐욕 때문에 갈라진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데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데,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흘러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파가 무엇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거듭남에 대한 분명한 확신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관원이었지만, 거듭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주간 기쁜소식’ 신문 독자 여러분 모두가 이제 교파 문제 때문에 고민하기보다, 정확한 복음을 통해 거듭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시길 바랍니다.
Q 주기도문(主祈禱文)과 사도신경(使徒信經)에 대해 알려주세요.
A. 주기도문에 대한 고정 관념
죄에 매여 가책과 두려움 속에 있던 많은 분들이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이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교회에서는 예배 때 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가 기도의 대부분이었는데, 어떤 분들은 죄 사함을 받고 나니까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를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워낙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대해 굳어진 고정관념과 종교적인 관습에 젖어 있던 분들은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하지 않으면 혹시 잘못된 교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갖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들이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일컫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배경이나 사도신경의 배경이나 참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용어의 문제점
먼저 소위 ‘주기도문(主祈禱文)’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선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용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성경에 ‘기도’는 있어도 ‘기도문’은 없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기도문’이라는 것은 이방 종교에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 이하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주님의 기도문’이 아닙니다. 즉 기도의 주체가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라 칭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배경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배경은 누가복음 11장 1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주님 편에서 먼저 정하여 제자들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자 제자 중 하나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하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 기도에 대해 어떤 이름을 붙이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 정도로 명명(命名)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지만, 마태복음 6장 9절 이하에 기록된 기도의 내용과 누가복음 11장 2절 이하에 기록된 기도의 내용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꼭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문장대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달하여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의 사정과 마음을 아뢰기도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세밀하게 더듬어 보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와 듣지 않으시는 기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9:31) 예수님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십니다.(히브리서 7:26)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죄 때문입니다.(이사야 59:1~2) 마음에 죄가 있으면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사1:15 및 59:1~2)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죄 사함부터 받아야 합니다. 의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15:29)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 들으십니다.
기도의 자세
마태복음 6장 5절과 7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기도의 자세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위 ‘주기도문’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 가져야 할 두 가지 태도를 말씀하시고 기도해야 할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 가르쳐 주신 기도의 태도는 기도할 때에 외식(外食)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외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는데, 사람을 의식하여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이 약속을 믿는 마음,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마음 없이 형식적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교회를 한번도 다녀보지 않았던 분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목사님이 대표 기도를 한번 시키셨답니다. 그 형제님은 기도하는 걸 많이 보지도 못했고, 당황이 좀 되었는데, 그냥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있는 대로 기도하면 모든 걸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다 싶어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구원하시느라고 그 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그럼 다음 이 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답니다. 형제 자매들이 너무 우스워서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님의 순수한 기도를 얼마나 기쁘게 들으셨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말이 좀 매끄럽지 못해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두 번째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태도는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이란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온 교회 교인들이 예배 때마다 항상 이 ‘기도문’으로 기도한다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가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러면 이 기도는 언제 누가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기도는 응답이 될 때까지는 믿음으로 구하고, 응답을 받았으면 감사를 드리고, 또 주님께서 구하게 하시는 다른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고 마6:9절을 보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After this manner therefore pray ye)”는 말과 “이 기도를 하라”는 말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이와 같은 태도와 내용으로 하라.’는 말이라면, 후자는 ‘이 기도를 그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도 자주 기도하셨고 제자들도 기도했지만, 사실 성경에는 예배 때마다 이 기도문으로 기도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고, 이 기도문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계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내용 말고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위해, 많은 제목을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응답을 받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 보면 뜻이 두 번 이루어지는데, 한번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졌고, 또 한번은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죠? 여기서 말하는 뜻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단에게 속아 죄에 빠져 있는 인간들, 멸망으로 가는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사랑을 가리키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려는 뜻을 세우시고, 우리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도 전에 - 이미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도 전에 하늘에서 먼저 우리를 향해 마음을 여셨고, 하늘에 계신 그분의 마음 안에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이미 디자인(design)된 인류 구원의 뜻이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고, 그 뜻을 따라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우리를 영원히 의롭게 했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10:10)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2)
그분의 죽으심은 하늘에서 이룬 뜻을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룬 것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1:10)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이미 이루어져 있던 뜻이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죄를 사하시기 전까지는 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도를 해야 했지만, 십자가 이후로는 이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베드로전서4: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日用)할 양식(daily bread)’이란 날마다 쓸 양식, 매일매일 필요한 양식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는, 자기 집에 그 날 그 날 먹을 양식이 부족함 없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오늘날 의식주에 문제가 없는 우리들과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마15:32)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아식을 잘라먹으니”(마12:1)
이런 형편 속에서는 날마다 그날그날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야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나라에서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들이나 열악한 여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성도들은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끼니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입에 발린 기도인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실리지 않은 거짓된 기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이구동성으로 이 기도를 한다면, 그 교회에는 전부 양식이 바닥난 사람들만 있다는 말밖에 안 될 것입니다. 정말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만, 이미 양식이 넉넉하게 있는 사람은 풍족한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눅1:77)의 복음을 모르는 분들이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이 대목에 와서 혼돈스러워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태어났고, 우리는 그 죄 때문에 저주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케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심으로써 아담 안에 속한 모든 인류의 죄를 영원히 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은 영원히 종료되었고, 더 이상 우리에게는 벌받을 죄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 즉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값을 온전히 갚으셨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는 우리를 영원히 의롭게 했다는 하나님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로마서5:9)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2:13)
그런데 왜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자, 성경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6:12)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대목을 잘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는데, 내가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고 해 봅시다.
“자, 이제 당신의 허물과 죄를 다 용서하겠습니다. 이제 지금부터 다시는 그 죄를 탓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당신이 저지른 잘못을 다 용서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이제 당신도 그 문제 잊어버리십시오.”라고 약속을 했다고 합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이지요? 그래 놓고 내가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또 “당신 그 때 나한테 잘못한 것 알고 있지요? 내가 그것 그냥 묵과할 줄 알아요? 내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거예요. 당신은 잊어도 난 절대로 잊을 수 없어요.”라고 한다면 그건 사해준 게 아니지요?
사람도 일단 죄를 사하여 주고 나면 두 번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아야 온전히 사해준 것이지, 사해주었다고 해놓고 또 들먹거리고, 만날 때마다 또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건 사해준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때 분명히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우리의 죄 문제를 끄집어 내신다면 그건 사해주신 게 아니고, 십자가의 공로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또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당신 나한테 빚진 거 있지요? 그거 빨리 안 갚습니까?”라고 한다면 그건 탕감해 준 게 아닌 것입니다. 내가 정말 탕감해 준다고 약속했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영원히 끝을 내버리고, 그 문제는 종결지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실 때도 일단 사하고 나면 다시는 그 문제를 두 번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도록 그렇게 온전히 사하여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법에도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셨고,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저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7~18)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에 친히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사귐을 갖고 가마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대개’
원문에는 '호티'라는 헬라어 접속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옵는 것은 하나님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이러한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1930년대) '중국어 성서'를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서에서 <大槪,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대략적으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사도신경
사도신경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봅시다.
‘사도신경'을 영어로는 The Apostles' Creed라 하는데, 우리말의 ‘사도신경(使徒信經)’은 문자적으로는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의 내용을 정리하여 경(經, 즉 경전, 성경)처럼 만든 것’이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본래 ‘경(經)’은 종교의 경전을 의미하는 말이며, 야고보서2:8과 23절, 베드로후서1:20 등에서는 ‘성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인간들이 만든 하나의 신조(信條)일 뿐이지, 결코 예수님의 사도들이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성경과 같은 위치에 둘 수 없는 것이며, ‘경(經)’으로 불러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사도의 이름을 빙자한 신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형성 배경
로마 카톨릭의 전승에 의하면, 12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 사도신경은 12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여서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인데, 베드로가 처음 한 구절을 기록하자 사도들이 한 구절씩 쓴 것을 모아서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A.D 4세기에 루피너스(Lufinus)라는 사람이 “사도신조 주석”을 쓰면서 주장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만일 사도신경이 정말 영감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성경과 같이 보존하셨을 것이며, 그 내용이 삭제되거나 추가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소위 ‘사도신경(이하 記述의 편의상 ‘사도신경’이라 칭함)은 모든 사도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 수세기 뒤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조이며, 수백 년 동안 그 내용이 첨삭(添削)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것을 신앙 고백의 신조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 종파들도 있으며, 교파마다 예배 때마다 외며 고백하는 문장의 내용에도 차이가 있고, 내용도 자세히 보면 성경과 너무 다른 부분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역사가들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는 4세기경에 “로마교회 구신조”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도신경의 모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199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에서 발행한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 전수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사도신경은 아주 짧았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도신경과 유사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6~7세기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거기에는 초기에는 발견되지 않는 구절과 단어들이 추가되어 8세기에 와서 비로소 현재와 같은 형태로 거의 고정되고, 12세기 이르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준됩니다.
한국교계 사도신경의 문제점
그럼 한국 교계의 사도신경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들이나 원문과 다른 부분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우리말 찬송가에 실린 사도신경을 보면 1894년 언더우드가 번역한 찬양가에는 “나는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참신 성부를 믿으며.....지옥에 내리사 사흘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성인이 서로 통공함을 믿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1905년 장로교회에서 발행한 찬송가에 실린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리셨더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의 사도신경을 보면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성소(古聖所)에 내리시어.....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라는 내용이 있습니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다. 제가 가진 국어사전에 ‘고성소’란 “지옥과 천당 사이에 있어, 기독교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나 성세(聖洗)를 받지 못한 어린이, 이교도, 백치들의 영혼이 사는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습니까?
A.D 750년 경에는 사도신경의 라틴어 본문에 원래 없었던 “그(예수님)는 음부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는 내용이 첨가되었습니다. 그것이 세계 모든 나라 사도신경에는 다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한국 장로교 찬송가 안표지에서는 그 내용을 넣었다가 나중에 만든 찬송가 안표지에서는 빼버렸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만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 마디의 해명도 없습니다.
또 A.D 650년 경에는 ‘거룩한 공회’라는 말이 부가되었는데,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영어로는 ‘거룩한 공회’가 ‘The Holy Catholic Church'(거룩한 카톨릭 교회)’라는 뜻입니다. ‘공회(公會,assembly)’라는 말은 ‘공중의 모임’이라는 말인데, 우리가 ‘공중의 모임을 믿는다’는 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고백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또한 성경에서 ‘공회’에 관한 대목들을 찾아봅시다.“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마26:59)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막15:1)
‘공회’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의미할 때도 있는데, 어찌 공회를 믿는다는 게 참된 신앙 고백이며, 그 고백을 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까? 오히려 이런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단입니다.
알고 보면 이 표현은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catholic’이라는 뜻이 ‘보편적, 세계적’이란 뜻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래 ‘로마교회 구신조’에는 ‘거룩한 교회를 믿사오며’ 라고 되어 있었는데, 약 8세시 경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란 말을 추가시켰습니다. 성경에는 어디에도 ‘카톨릭’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카톨릭 교회가 이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며, 거기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참하게 죽이고 핍박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 부분이 추가 삽입된 점을 감안하면, 이런 고백은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도 성경적으로 잘 알아야 할 부분입니다. 원래 성도를 의미하는 단어 ‘saints’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씻고 거듭나 거룩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Saints'라는 말은 카톨릭에서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되는 특별한 사람’에게 주는 칭호(성인)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런 성인에게 하는 기도문이 있고, 그 기도를 통하여 죽은 자와도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본래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은 거듭난 성도들 간의 영적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성인들과의 교통(交通)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카톨릭의 사도신경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내용도 성경과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했고,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무리 앞에서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9:4)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눅23:14) 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성경은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눅23:20)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죽이려 했던 장본인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다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막15:15) 예수님을 그들의 손에 넘겨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행3:13)
한국 교회에서도 이제서야 문제점을 느끼고 최근 재번역 논의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데, 번역에 앞서 기성교회가 지금까지 얼마나 교인들을 잘못 인도해 왔으며, 참된 교회를 비방하고 대적하도록 해 왔는지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참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참으로 어떤 말씀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떤 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교회인지를 밝히 알아 거짓된 교회와 교리에서 단호히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Q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는 것입니까?
A. 첫째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로 인해 사망을 당하면서도, 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 때문에 사망을 당한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살다가 마지막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예수님을 보내어 구원의 길을 열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행 2:23)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통해 인간에게 영생의 길을 주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이 죄로 인해 멸망당할 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예수님께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율법을 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선하게 살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줄로 알고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 분명하게, 율법을 주신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한다고 했습니다(롬 7:13). 이처럼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죄인인 것을 깨우쳐 주어서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못박아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자신이 멸망당할 자인 것을 발견하여 마음을 낮추게 되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새 언약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게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적당히 대충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온전한 행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사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율법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셋째로, 사망을 당할 인간에게 주어진 속죄소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내려 주실 때에 함께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막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24장까지는 율법에 관한 말씀이고, 25장부터는 성막에 관한 말씀입니다. 25장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법궤와 속죄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 하나님은, 율법을 기록한 두 개의 돌판을 속죄소(贖罪所, 죄를 씻는 장소), 즉 시은좌(施恩座, 은혜를 베푸는 자리)로 덮어 버려 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 돌판을 덮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덮인 은혜의 자리에서 우리와 만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와 은혜 가운데서 만나길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신앙 가운데 율법을 기록한 돌판을 가린 속죄소가 없는 사람은, 늘 율법을 보며 살아 갑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잘할 때에는 천국에 갈 것 같고, 못할 때에는 멸망당할 것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 갑니다. 법에 매인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유와 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속죄소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넷째로, 새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는 사람이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율법을 가릴 속죄소를 주셨습니다. 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한 후, 속죄소의 사랑을 주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모르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1∼33) 이 새 언약은 율법과 다른 법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법을 사람들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려면, 먼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죄가 사해져야 합니다. 그 일을 이루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섯째,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할 수 없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연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성경은 율법도 연약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8,19) 율법은 무익하기에 폐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게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께 나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히 8:7,8) 앞에서,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육신에 죄를 정하셨습니다. 율법은 온전한 행위를 요구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행위가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사망을 당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죄의 값을 지불해 줄 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고, 그 몸에 우리 죄를 정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야 할 사망을 예수님에게 내리셔서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 뜻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의 요구인 사망을 당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5) 예수님은 그 몸으로 율법의 요구인 사망을 들어 주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었습니다(롬 10:4). 율법을 끝을 낸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폐한다’는 것은 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에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요구인 사망을 지불하러 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의롭게 해 주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고, 완전케 하신 것이며, 다 이루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다 들어 주어 사망을 당하심으로 인해, 율법은 마쳐졌습니다.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마지막으로,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은 다릅니다.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신 후 우리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시려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 주셨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하나님이 그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 7:2,3)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이 죽으면 남편이라는 법에서 자유케 됩니다. 예수님은 이 남편을 율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예수님의 몸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희 부대에 김OO 일병이 있었습니다. 그가 첫 휴가를 나가서는 술을 먹고 고함을 치다가 헌병에게 붙들려 소속, 계급, 군번, 이름을 적어 주었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는데, 두 달쯤 지나서 사령부에서 “일병 김OO 영창 7일”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바로 헌병대로 연행되었고, 7일 동안 군 영창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OO이가 군인이 아니었다면 영창에 갔겠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군인이 아니라면 영창에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군인이기 때문에, 군법을 위반한 것으로 인해 영창에 간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제가 제대하는 날이 왔습니다. 굉장히 기다리던 제대였습니다. 부대를 나서려고 하는데, 정문에 헌병이 서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헌병만 보면 옷을 살펴보았지만, 그 날은 헌병의 어깨를 치면서 “김 상병, 수고해라.” 하면서 나왔습니다. 저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대’라는 것이 저를 군법에서 해방시킨 후, 일반 법 아래로 가게 했습니다. 더 이상 헌병이 저의 잘못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제가 잘못하면 경찰이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제대가 군법 아래서의 삶을 마치게 했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율법에서 제대시켜 버린 것입니다. 제대한 사람은 군인의 신분이 아닌 민간인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키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고서도 여전히 율법에 매인 삶을 살아간다면, 속죄소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고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행동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를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자신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율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며(롬 8:1),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입니다.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을 쫓아 살지 않았고, 육체를 따라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을 마음에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죄악 속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하셨고,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각오하고 결심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예수님을 쫓는 동안 예수님이 죄를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Q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항상 악하다고 하셨는데,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선을 행하라고 나와있는 말씀들도 보게됩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 모든 사람에게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선하게 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선을 행하려는 성향이 있고, 생활 속에서도 ‘선을 권하고 악을 배척하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마음 속에 형성되어 있는 선악의 판단 기준이 시대, 민족, 지역, 성장 과정 등 여러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주 변하는 것은 정확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악의 참된 기준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됩니다. ‘악’에 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렘 2: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 어느 누구도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율법을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음성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땅에 기근이 심하게 들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채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는, 마음에 육신의 욕망이 일어나자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는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항상 악한 인간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우리 역시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악한 자인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생활 속에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저버립니까? “탐심을 품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알면서도 좋은 것을 보면 늘 탐심을 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저버립니다. “분을 내지 말라.”는 말씀을 알면서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절제하지 못한 채 곧 화를 내는 것을 봅니다. 그런 우리들이기에, 하나님은 우리 근본이 ‘행악의 종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감 종자를 땅에 심으면 나중에 감이 열리고, 포도 종자를 땅에 심으면 포도가 열리듯,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행악의 종자로 태어났기에 항상 악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한번은 평생 김밥을 말아 번 돈 50억 원을 어느 학교에 희사(喜捨)한 70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김밥 50억 원어치의 분량이라면 정말 막대한 것입니다. 따져 보면 그 할머니의 인생 전부를 희사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 그 할머니를 보고 악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학교에 희사한 50억 원은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욥 35:8)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러하시듯 그 할머니 역시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밖에 볼 수 없는 사람과 달리 마음의 중심까지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렘 17:9)고 하셨으며, 악한 생각 곧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마음에도 동일하게 이런 악한 것들이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악한 근본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도 많은 선을 행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더 많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악한 자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의를 나타낼 수 없었고, 결국 재물을 더 사랑하였기에 심히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 이야기 앞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면서 자신을 세리보다 더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한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리의 기도를 기뻐하셨고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리의 기도처럼 우리 인간은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셨을까요? 항상 악한 우리가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는 것’(렘 13:23)처럼 악에 익숙한 우리 역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에게서는 어떤 선한 것도 요구하실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 내버려두셨고, 그 더러움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악을 깨닫고 당신에게로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당신이 예비해 놓으신 의를 주시는데, 그 의를 가지고 우리가 선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미가서를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신 ‘선한 것’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악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멀어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화목케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신 후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당신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같이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마음이 바뀌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던 베드로 역시 그 사랑을 경험한 뒤로 달라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월절을 예비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맹세했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그가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베드로는 자신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악한 모습을 깊이 본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활 후 세 번째 나타나셨을 때에는 제자들과 같이 조반을 먹은 후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모습과 상관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 번이나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여전히 “주여, 그러하외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의 의를 힘있게 나타냈습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지는 못하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달처럼, 우리 스스로는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비친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행하는 선은, 복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Q '마음에 죄는있지만, 예수님을 믿기때문에 천국에 갈수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믿음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구체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는지요?
A.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혼돈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셨지만, 이들은 마음 속에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에 대한 기준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로리(R. Lowry)가 작사 작곡한 찬송가 343장에 보면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하는 가사가 나옵니다. 우는 것과 힘쓰는 것, 착한 것과 참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이나 율법을 따라 착하게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고 있기에, 참된 믿음과는 상관없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특히, 몇몇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성경적으로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바른 믿음으로 고집하기에 마음이 말씀 앞에 여리고 성처럼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통 신앙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참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믿음을 참 믿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그릇된 믿음 중 하나가 바로 ‘비록 죄가 있지만, 예수를 믿기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마음에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믿고 있다는 생각이 바른 믿음일까요?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권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정확히 잴 수 있는 잣대이며, 신앙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참된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서로 짝이 있어,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바로잡아 줍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를 시험하려면 성경에 비추어봐야 합니다.
만일 성경적으로 잘못된 믿음이라면, 결국 버리운 자가 되어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몇몇 구절만 가지고 믿음을 확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성경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잘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들 중 한 부류는 ‘예수님을 믿지만 죄인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말씀만을, 그 믿음의 근거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 나오는 의인에 관한 말씀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의 전체적인 것에 비추어 자기 믿음을 시험하거나 확증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맞는 말씀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믿음이고 구원인데, 뭐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들 역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는 말씀만 의지할 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마 7:21)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봅니다.
Q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발을 씻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를 씻음받았지만, 매일매일 짓는 죄는 회개 기도를 통해 계속 씻어 간다는 것입니까?
A. 답변 :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동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로 가실 때가 임박한 줄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13장 시작 부분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자기 사람들’이란,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예수님의 사람들, 즉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뜻이 있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외에 또 한 가지의 사역을 하실 것을 요한복음 13장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사람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라.’는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가증한 모습이 나오지만, 예수님은 그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 씻기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요13:4,5) 그렇게 발을 씻어 가다가 베드로에게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어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이 태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수 대야에 물을 담아 들고 오셨고, 제자들에게 수건을 들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자신의 허리에 두르시고 발을 씻겼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제자들의 발을 반드시 씻기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2. 성령이 하시는 일 요한복음 13장 7절에서 10절 사이의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눈 대화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는 일이 단지 육체의 발을 씻겨 주는 섬김에 그치지 않고, 숨은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후에는 알리라.”고 하셨는데, 그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이 오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는데, 보혜사 성령,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되면 성령께서 실제로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하고, 그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거듭난 사람이라야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 발을 씻겨 주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절에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목욕을 한다는 것과 발을 씻는다는 것은 둘 다 ‘더러운 것을 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죄가 해결되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여 “목욕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그때까지 지은 모든 죄를 씻음받는 것을 가리키고, 발을 씻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범하는 죄를 고백하고 기도함으로 순간순간 용서받는 것이다.”라고 여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말은 그럴 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아닙니다.
‘목욕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온 몸을 깨끗이 씻는 것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받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써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단 한 번에, 어느 기간 동안의 죄만 씻은 것이 아니라 영원 동안 인간들이 짓는 모든 죄를 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위해 다시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히 10:18)
또한,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셨습니다(요일 2:2).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은, 단 한 번 드려짐으로 조상들의 죄나 현재 우리들의 죄나 앞으로 이 땅에 살게 될 우리 후손들의 죄 모두를 씻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 큰 죄나 작은 죄, 용서될 것 같은 죄나 용서되지 않을 것 같은 죄, 숨기고 있는 죄나 드러난 죄, 악해 보이는 죄나 선해 보이는 죄 모두를, 여하튼 죄라는 죄는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그 모든 죄를 영원히 씻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목욕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목욕’이란,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신 것을 말합니다. 그 보혈의 능력으로 씻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지은 죄든, 알고 난 후에 지은 죄든, 죄는 모두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단번에 씻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면, 다시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를 기도함으로 속죄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의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고, 범죄했을 때 그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하려고 애쓰면, 오히려 죄에 더 매이고 더욱 죄에 빠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이미 씻어진 그 사실을 믿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는 영원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다시 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하면서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처럼 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리고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접하며 살다가 발에 더러운 것이 묻었을 때, 즉 마음에 죄악된 생각이 들어왔을 때, 성령께서 그 죄악들을 말씀의 물로 깨끗이 제거해 주는 일을 하십니다.
예를 들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 마음을 제거해 주고 오히려 그 사람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주신다든지, 슬픔이나 고통이나 낙망이 생겼을 때 그것을 제거하고 예수님의 기쁨이나 평안이나 소망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3. 목욕한 자라야 우리는 우리 힘으로 목욕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는 발도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발은 예수님이 친히 씻겨 주신 것이지, 제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발을 씻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문제는, 오직 예수님 앞에 들고 나아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먼저 사람들이 목욕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즉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려고 자꾸 자기 힘으로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처럼 속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충성이나 열심, 가책이나 기도, 그 무엇으로도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죄를 씻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뿐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네 힘으로 죄를 안 짓고 하나님을 잘 섬겨 봐라.’ 하고 속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여전히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께 우리 마음과 삶을 맡겨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목욕시켜 주시기 위해 곧 십자가로 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난 사람들 마음에 오셔서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실 성령의 사역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구원 문제뿐 아니라 남은 삶의 문제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은 이처럼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씻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 안에 영으로 오셔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의 죄짐을 지고 허덕이며, 하나님을 잘 섬겨 보려고 죄와 싸우면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정말 깨달아야 할 사실은, 자신은 죄와 싸워서 결코 이길 수는 악한 인간이며, 또 그 죄를 씻을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의 큰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범한 죄를 기도함으로 속죄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꼭 목욕을 한 자, 즉 모든 죄를 씻음받고 죄에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목욕을 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기시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Q 요일1:9의 자백은 분명 거듭난 이후에도 짓는 죄에 대한 자백인데 어떻게 자백해야 하나요.
A. 답변 : 자백은 어떻게 하나요? 자백하는데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변화나 상태입니다. 근본 악을 인정하고 예를 들어, "욕을 했다면 욕을 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임을, 욕을 하게 된 근본 동기, 곧, 교만 말씀부족 영적 공급 결핍된 영혼의 모습 임을, 말씀이 없었다던지, 즉, 다윗의 간음죄 같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 여긴 것이 근본 잘못 되었음을 (삼하 12;8,9)" 마음으로 인정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잘못이 인정되면 저절로 시인이 되고 자백이됩니다. 물론 그 죄에 매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죄도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 된 것을 믿습니다. 이런 잘못에 대해 주님 죄송 합니다. 미련하게 행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마는 표현보다 마음의 깨달음과 뉘우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말보다 마음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